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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이 주지 石井十次 의 일생 - 일본 최초의 고아원 설립자일본연구 2026. 6. 18. 20:15

고지마 도라지로(児島虎次郎), 1907, 愛情の庭 (애정의 정원, Garden of Affection): 오카야마 고아원(이시이 주지의 고아원)을 그린 작품 이시이 주지(石井十次)

이시이 주지(石井十次, 1865~1914)는 메이지 시대 일본 최초의 본격적인 고아원을 설립하여 평생 3,000명이 넘는 아이들을 구제한 '일본 아동복지의 아버지' 1. . 청년기 및 신앙과의 만남 (1865~1884)
「새 허리띠를 벗어 준 소년」
1865년, 미야자키현 다카나베의 하급 무사 집안에서 태어난 이시이 주지는 어려운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어머니 노부코의 영향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또한 어린 시절부터 다카나베번의 명륜당에서 유교 교육을 받으며, 어려운 이웃을 돕고 공동체를 섬기는 정신을 배웠습니다.
그의 어린 시절을 대표하는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일곱 살 때, 어머니가 축제를 위해 새 허리띠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축제에 갔던 주지는 낡은 유카타에 새끼줄을 허리띠 대신 두르고 있는 친구가 놀림을 받아 울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는 망설임 없이 자신의 새 허리띠를 풀어 친구에게 건네주었고, 집으로 돌아와 그 사실을 들은 어머니는 "참 잘했다."며 아들을 칭찬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지금도 다카나베 지역 학생들에게 전해지는 대표적인 일화입니다.
열네 살에는 나라를 위해 봉사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도쿄의 공옥사에 입학하여 해군 장교를 꿈꾸었지만, 각기병으로 인해 꿈을 접고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이후 초등학교 교사와 경찰서 서기를 지내던 중, 독실한 그리스도인이었던 의사 오기와라 도도헤이를 만나 기독교의 박애 정신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1882년, 열일곱 살의 나이에 오카야마 갑종의학교에 입학하였고, 오카야마교회의 가나모리 미치토모 목사를 만나 19세에 세례를 받았습니다. 같은 해 여름방학에는 고향으로 돌아가 마을 청년들과 함께 낮에는 농사를 짓고 밤에는 공부하는 '바바하라 교육회'를 조직하며, 사람을 변화시키는 가장 큰 힘은 교육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2. 터닝 포인트와 고아원 설립 (1887~1889)
「의학책을 모두 불태운 결단」
의학교에서 임상실습을 하던 중, 진료소 옆 태자당에서 사국 순례를 하던 한 여인을 만났습니다. 두 아이를 데리고 다니던 그녀는 생활이 너무 어려워 "큰아이만이라도 맡아 달라."며 눈물로 부탁했습니다.
이시이는 아내 시나코와 상의한 끝에 그 아이를 받아들였고, 이후 두 명의 고아를 더 돌보게 되었습니다. 집이 비좁아지자 오카야마의 삼우사(三友寺) 한 방을 빌려 1887년 '고아교육회'를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훗날 오카야마 고아원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이 무렵 영국 브리스톨에서 수많은 고아를 돌본 조지 뮬러의 사역을 접한 그는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는 "나는 일본의 조지 뮬러가 되겠다."고 결심했지만, 의학과 고아 사역을 함께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마침내 그는 "의사가 될 사람은 많지만, 버려진 아이들을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칠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지금까지 공부했던 의학책을 모두 불태워 버렸습니다. 이는 평생을 고아들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그의 결단을 상징하는 가장 유명한 일화로 전해집니다.
고아원이 점차 자리를 잡아가던 가운데, 이시이는 단순히 고아를 돌보는 시설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아이들과 성도들이 함께 예배드리고 생활하며 신앙 안에서 공동체를 이루는 교회를 세우고자 했습니다.
그렇게 세워진 곳이 바로 오카야마의 고난교회(苦難教会)였습니다. '고난교회'라는 이름에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따르며 세상의 고난받는 사람들과 함께하겠다는 뜻이 담겨 있었습니다. 이 교회는 단순히 예배만 드리는 곳이 아니라, 고아와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들을 돌보는 삶의 공동체였습니다.
이시이는 "참된 신앙은 고난당하는 이웃과 함께하는 삶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고난교회는 오카야마 고아원과 하나가 되어 아이들을 함께 양육했고, 교인들은 아이들을 가족처럼 품으며 생활했습니다. 예배와 교육, 노동과 봉사가 모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신앙의 실천이라고 가르쳤으며, 이러한 정신은 이후 일본 기독교 사회복지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1887 ~ 1926, Okayama Orphanage 3. 고아원의 확장과 '무제한 수용' (1891~1906)
「재난이 있는 곳마다 찾아간 사람」
1891년 노비 대지진이 발생하자, 이시이는 직접 피해 지역으로 달려가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오카야마로 데려왔습니다. 이후에도 오카야마 대홍수와 각종 재해가 발생할 때마다 가장 먼저 현장으로 달려가 고아들을 보호했습니다.
주변에서는 "더 이상은 감당할 수 없다."고 만류했지만, 그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아이를 거절할 수는 없다."며 단 한 명의 아이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오카야마 고아원은 점차 '거절하지 않는 고아원'으로 전국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1903 ~1907, 오카야마 고아원 청년음악대(青年音楽隊)
「일본 전역을 감동시킨 고아원 음악대」고아가 계속 늘어나자 운영은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그러나 이시이는 아이들에게 구걸을 시키지 않았습니다. 대신 아이들에게 음악과 연극을 가르쳐 '오카야마 고아원 음악·환등대'를 조직했습니다.
아이들은 전국을 순회하며 연주와 연극을 공연했고, 자신들의 삶을 진솔하게 소개했습니다. 공연을 본 많은 사람들이 감동하여 자발적으로 후원금을 냈으며, 이 수입은 고아원의 중요한 재정 기반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하와이와 대만까지 순회공연을 하며 일본 사회에 고아원 사역을 널리 알렸습니다.「1,200명의 아이를 품다」
1906년 도호쿠 지방에 큰 흉년이 들자 수많은 아이들이 부모를 잃었습니다. 이시이는 다시 한번 "고아들을 모두 받아들이겠다."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결국 오카야마 고아원의 아이들은 약 1,200명에 이르렀습니다. 운영은 한계에 다다랐지만, 그의 헌신에 감동한 구라시키의 실업가 오하라 마고사부로를 비롯한 수많은 후원자들이 힘을 보탰습니다. 이들의 지원은 일본 사회에 기독교적 사랑과 아동복지의 중요성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4. 사역의 이정과 마지막 (1910~1914)
「아이들에게 가장 좋은 학교는 자연이다」
주지는 프랑스 철학자 루소의 『에밀』에 영향을 받아 자연 속에서 배우고 일하는 교육을 꿈꾸었습니다.
그는 "유아는 마음껏 놀게 하고, 어린이는 배우게 하며, 청년은 일하게 하라."는 교육 철학을 세웠고, 아이들에게 가장 좋은 교실은 자연이라고 믿었습니다.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는 고향 미야자키 차우스바루의 넓은 황무지를 개간하기 시작했고, 아이들과 함께 직접 삽과 괭이를 들고 농사를 지었습니다. 1912년에는 오카야마 고아원을 이곳으로 완전히 이전하여 자연 속에서 배우고 일하는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하나님이 원장이십니다」
평생 자신보다 아이들을 먼저 생각하며 살아온 주지는 과로와 신장병으로 건강이 크게 악화되었습니다. 1914년 1월, 병상에서 손자의 탄생 소식을 들은 뒤 생애를 마감했습니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사역하던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죽더라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오카야마 고아원의 원장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는 한 우리 아이들은 결코 버림받지 않을 것입니다."
이 유언은 오늘날까지도 이시이 주지의 신앙과 삶을 가장 잘 보여 주는 말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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